매년 찾아오는 크리스마스인데도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부푼다. 아니 오히려 어릴 적 나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을 몰랐으니, 다 큰 성인이 되어서야 제대로 이 축제를 즐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부모님은 너무 열심히 사느라 우리 자매를 무척 사랑했지만 산타클로스에 대한 동심을 자라게 할 만큼은 여유롭지 않았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우리 가족에게 그냥 평범한 공휴일 중 하루였다.
어찌 되었든 내가 어른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크리스마스 이벤트들은 어느새 나에게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12월에 들어서고부터는 플레이리스트가 캐럴로 바뀌고, 꽁꽁 싸뒀던 트리 장식을 꺼냈다. 잊지 않고 유명한 제과점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예약해 둔다. 남편에게 줄 선물과 크리스마스카드도 골라야 한다. 어떤 해에는 영화나 공연을 보기도 하고, 유명한 맛집이나 카페를 찾아갔다. 그렇게 매년 특별한 행사들로 추억이 생겼고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중요한 일정이 되었다.
올해도 늘 그래왔듯 그럭저럭 꽤 괜찮은 시간을 보냈고, 남편과 맛있는 저녁 성찬을 즐긴 후 배부르게 소파에 기대어 늘어진 늦은 저녁 시간이 되었다. 그러다 무심코 본 나의 핸드폰에는 한참 전에 도착한, 읽지 않은 메시지가 보였다. 엄마의 시시콜콜한 일상 메시지였다. 문득 나에게는 매년 이벤트들로 채워 온 즐거운 크리스마스였는데, 엄마는 크리스마스가 아무런 특별한 날도 아니었던 어릴 적 옛날 그곳에 여전히 머물러 있음을 깨달았다.
내 유일한 여동생도 나처럼 친구나 연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분주했을 것이다. 우리 자매는 성인이 된 후에 고향을 떠나와 타지역에서 독립된 생활을 했다. 학업 때문에, 직장 때문에, 또 그다음엔 각자 가정이 생겼다는 이유로, 뭐 이런저런 핑계로 자주 찾아갈 수도 없었으니 그렇게 늙은 부모는 우리의 뒤에 남겨졌다.
나는 엄마의 메시지에서 슬며시 새어 묻어나오는 것이 ‘외로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가 느끼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자식에게 부채감을 안긴다. 그 부채감은 자식이 채울 수 없는 깨진 항아리와도 같다. 눈앞에 산적해 있는 인생의 다음 과제로 나아가느라 바쁜 자식들이 이따금 되돌아와 채워 넣는 애정과 관심은, 그동안 부모가 준 사랑과 걱정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다.
어느새 내 인생에서 부모님은 활성 플레이어 캐릭터가 아닌 NPC 캐릭터가 되었다. 중요한 미션들을 먼저 해내고 내가 필요하거나 여유 있을 때 가끔 찾아가서 깨주는 퀘스트처럼 그렇게 부모를 찾았다. 다만 게임과 다른 점은, 게임 속 NPC는 내가 없을 때도 그곳에 오래도록 지키고 있는데, 나의 부모님은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간혹 아프기도 하고, 쓸쓸해하며, 또 내가 몇 날 며칠은 부모를 생각하지 않을 때도 나를 사랑하고 보고 싶어 한다.
우리 자매는 꽤 자주 부모님과 연락하고, 찾아가서 시간을 보내는 노력을 함에도, 365일을 함께 하지는 못한다. 자식이 장성해 건강한 가정을 꾸렸다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영원히 채울 수 없는 항아리를 갑작스레 받아 들고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나의 부모에게 남은 퀘스트가 여전히 ‘자식’일지라도, 어차피 비슷한 항아리를 나의 자식에게도 넘겨주게 될 것이니 그저 이것이 인생이라고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다.
크리스마스는 어릴 적 내 가족에게 평범한 공휴일이었지만, 대신 특별한 일정이 있었다. 바로 12월 31일에서 다음 해 1월 1일로 넘어가는 때이다. 부모님은 이른 새벽에 곤히 자는 어린 나와 동생을 억지로 깨웠다. 그리고 우리는 잠에서 덜 깬 채로 두꺼운 외투, 목도리, 장갑으로 중무장했고 그동안 엄마는 보온병에 따뜻한 차를 담았다. 우리 가족은 아빠의 덜덜거리는 차에 올라탔고 한참을 꼬불꼬불한 해안 길을 달려 바닷가에 도착한다. 그리고 추위에 떨면서 옹기종기 붙어 바다 끝 수평선을 넘어 떠오르는 새해를 맞이했고, 소망을 빌었다. 한참을 해를 보고 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추위에 꽁꽁 언 몸을 따뜻한 엄마표 떡국을 먹으며 녹인다. 그것은 오래된 부모님만의 이벤트인 셈이다.
그 이벤트를 위해 아빠는 미리 일출 시각을 확인하고 해를 보기에 가장 좋은 장소를 고민한다. 엄마는 해를 기다리는 동안 편의를 제공해 줄 아이템들을 마련했고, 돌아와 먹을 떡국 재료, 우리 자매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할 여러 방법 따위를 준비했다. 바로 내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어른이 된 우리 자매는, 이제 그 마음을 이해할 정도로 성숙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지엽적으로 각자의 히스토리를 쌓으며 살아가지만, 12월 31일에는 약속한 듯이 시간을 내어 다시 하나의 큰 흐름이 된다. 우리는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일상 이야기를 하며 엄마의 문자메시지에 응답했다. 엄마에게는 평범한 크리스마스가 따뜻하고 평안하기를 바라며.
202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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