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같이 찾아오던 한파에 오들오들 떨던, 뜨거운 것이 간절한 어느 날. 추워서 어딜 나가기는 두렵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기는 무기력하던 중 코로나로 몇 년째 발길을 뚝 끊었던 찜질방이 생각났다. 여기저기서 "아이고~"하는 곡소리가 들리고,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운 공기에 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룩주룩 흐르던 K-불가마. 시원한 식혜와 삶은 계란, 양 머리 모양 수건이 국룰인 바로 그곳. 좋아 바로 오늘이다.
"그런데, 코로나로 찜질방이 아직 살아남았을까?"
찜질방은 코로나가 불러온 확신의 금기 키워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의문에 의지가 잠시 사그라들었지만,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말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목욕탕 문화라고 생각한다.
역시 코로나의 위력에도 K-찜질방은 건재하고 있었다. "사우나의 효능. 코로나도 이기게 하는~"으로 시작하는 정말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 의문스러운 기사가 코팅되어 위풍당당하게 목욕탕 입구에 붙어있었다.몇 년 만에 찾은 낯선 찜질방 입구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직원의 안내를 기다렸다.
"이거는 찜질방 여자 옷 남자 옷이고요. 여자는 여기서 신발장 키 받아 가시고요, 남자는 신발장에 키 꽂혀있어요. 이거는 여자 수건. 여자 수건은 추가하시려면 비용이 있고요. 남자는 탕 들어가시면 수건 있으세요"
직원의 속사포 랩에 넋이 살짝 나갈 뻔했으나, 주섬주섬 할당받은 내 몫을 챙겼다.
'그런데 신발장 키를 배당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여자는 발이 여러 개라도 된단 말인가?'
문득 신발장 키는 왜 남녀 차별을 둔 건지 정말 궁금해졌다. 여탕의 수건 개수 제한은 솔직히 이유가 짐작도 되는 바였다. 여탕에서는 수건이 많이 소비되기도 하고, 또 소멸하기도 한다. 목욕탕 수건이 하도 사라지니 어떤 목욕탕은 공용 수건에 '훔친 수건'이라고 인쇄해 배부한다는 일화. 여탕은 수건이 사라지고, 남탕은 수건이 계속 늘어난다는 귀신 곡할 노릇의 이야기는, 아줌마의 알뜰 정신과 아저씨의 무신경함으로 빚어진 팽팽한 제로섬 게임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절차를 거친 후 입장한 목욕탕은 기대 이상으로 엄청나게 좋았다. 탕은 온도별로 나뉘어 있었고, 노천탕, 폭포탕, 안마탕 등 ‘뭘 이런 걸 다’ 싶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몸을 담글 곳을 갖추고 있었다. 뜨끈뜨끈한 탕에 나도 몸을 반쯤 담그자 ‘아 이거지~’하는 희열과 감동이 뭉근하게 몰려왔다. 잠시 신선놀음에 취해 있다 정신을 차리니 서서히 목욕탕의 이곳저곳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유 및 각종 마사지 금지, 샤워하고 탕에 들어가시오, 염색 절대 금지, 빨래하지 마세요, 음식물 섭취 금지, 핸드폰 소지 금지, 잡담을 삼가세요, 탕 내에 바가지를 들고 가지 마세요, 자리 맡기 금지, 수영금지, 다이빙 금지, 달리기 금지…'
목욕탕의 벽면에는 타일이 보이는 빈 곳이 더 적을 정도로 온갖 표기가 붙어 있었다. 해당 내용을 어길 시 강제 퇴장을 당할 것이라는 엄포까지. 그 내용은 하나 같이 뭘 금지하고 경고하는 협박성 메시지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웃음이 비실 새어 나왔다.
또 벽면 어딘가 남은 여백이 있다 싶으면 목욕탕을 제대로 이용하는 규칙까지 친절하게 소개하며 틈을 채웠다. 탕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머리를 감고 비누 샤워를 한 다음 반드시 머리카락을 수건에 감싸야 하고, 정숙한 상태로, 수분 섭취를 충분히 하고, 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돼, 탕에 몇 분을 몸을 담가야 하는지, 이 탕에서는 어떤 효능을 볼 수 있는지까지. 너무 많은 텍스트를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접하자 어질어질해졌다. 뜻밖의 텍스트 과잉 속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우리 동네에도 어릴 때 엄마를 따라서 다니던 작은 목욕탕이 있었다. 동네 아줌마들을 일명 '달 목욕'이라는 시스템에 중독되어 있었는데, 우리 엄마도 그중 하나였다. 목욕탕은 단순히 몸을 씻는 곳이 아니라, 일종의 커뮤니티의 역할을 했다. 목욕탕에서는 서로 모두 아는 사이였고 사춘기의 나는 억지로 "누구 딸이에요" 하면서 인사를 했다. 벌거벗은 상태로 쌓은 친목은 무엇보다 끈끈하고 파워를 가졌다. 탈의실 마루에서는 집에서 싸 온 음식을 펼쳐 놓고 나누어 먹었고, 누구 집에 수저를 몇 개 놓는지와 같은 사사로운 소식을 꿰뚫는 공간이자 염색, 다이어트, 마사지, 공동구매까지 할 수 있는 목욕탕은 완벽한 뷰티 복합 문화 공간 같은 곳이었다. 이 시스템 안에 안락하게 안착했다면 꽤 편리함을 누릴 수 있는데 만약 당신이 이 시스템 밖의 외부인이라면 엄청나게 불편하다.
'왜 모든 자리에는 목욕 바구니로 찜을 해 놓고 자리 주인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지, 사람은 한 명인데 자리를 몇 개를 쓰시는지, 여기가 어린이 혼성 수영장 이였던가, 왜 제 몸을 그렇게 빤히 보세요?'와 같은 등등의 불쾌함이 동반될 수도 있다. 일부의 나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내 경험이 스쳐 지나가자 이 모든 세세한 금지에 조금 수긍도 되었다. 도시의 좀 큰 대중목욕탕에서는 외부인을 배척하는 목욕탕 커뮤니티와 그 들만의 이상한 룰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엄격하게 경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잡념들로 가득해진 머리를 샤워로 비워낸 뒤 묘한 전통다움이 느껴지는 찜질복으로 갈아입고 입구에서 다시 남편을 만났다. 나는 목욕탕에서 본 각종 금지에 대해 남편에게 들려주며 찜질방으로 향했다. 착한 내 남편은 이야기를 들으며 이따금 "그건 그렇네, 웃기네" 와 같은 맞장구를 쳐주었다.
찜질방도 목욕탕처럼 다양한 종류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금방, 황토방, 적외선방, 수면방, 아이스방, 토굴방, 불가마방" 이제 각종 방을 옮겨 다니며 몸을 지져 볼 시간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찾은 전통불가마는 이글루 같은 모양이었다. 허리를 숙여 기어가듯 입구로 들어가자 안쪽에서는 어마어마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뒤따라 들어온 남편은 채 5분도 못 견디고 "GG"를 외치며 탈출했다. 하지만 나는 열에 강하다. 이 정도쯤이야. 결의의 찬 표정으로, 온몸으로 열을 느꼈다. 정수리부터 땀이 주르륵 흐르며 피로와 스트레스가 풀리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오가며 이글루의 문이 열릴 때 들어오는 외부의 찬 공기는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불 천국을 즐기던 중 중년의 아저씨가 "어허, 좋다"를 연발하며 불가마로 입장했다. 그리고 온갖 부스럭거리는 잡소리를 내며 누울 자리를 만들어 내 시선을 집중시키더니 곧 대(大)자로 누웠다. 그다음 옆으로 살짝 자세를 틀었다. 그때였다.
"북"
누가 북소리를 내었는가. Book! 그렇다 정확히 '북'이었다. 내가 찜질방에서 읽으려고 가져온 내 책이 낸 소리던가.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뜨겁고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방귀'라니! 큰 충격에 휩싸여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나 말고도 몇몇이 더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하나같이 부처와 같은 표정으로 평화로웠다.
'지금 나만 이상한 거야?' 매스꺼움이 몰려와 나는 곧바로 이글루에서 뛰쳐나왔다.
"와 시바…"
내가 나오자마자 영혼 털린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자, 밖에서 열을 식히며 기다리던 남편이 휘둥그레 나를 쳐다봤다. 나는 외쳤다.
"여보! 금지는 여기다가 붙여야 할 것 같아. 방!구!금!지!"
22.12.10.
'문화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을 정의하게 된 경위에 관하여 (0) | 2024.01.04 |
---|---|
클린이는 죄가 없다 (1) | 2023.12.30 |
해피홀리데이 (0) | 2023.12.26 |
간단한 해결 방법 (1) | 2023.12.25 |
[아바타: 물의 길]인간에게 판도라 행성이 왜 필요해졌을까 (1) | 2023.12.23 |